7년 전 대선 당시 우리 나이대-나는 대학교 2학년, 막 성년이 된 때였다-의 사람들에게 있어 노무현은 문자 그대로 '꿈'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여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이회창은 대한민국의 모든 부정적인 과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내 주변의 수많은 친구들, 선배들이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고, 그는 당선되었다.
그 때 나는 이회창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여기에 분노를 표출하거나 속된 말로 '까대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결정에 공감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때-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지만-주위에 나는 거의 '수꼴'로 찍혀 있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내가 노무현에게 표를 줄 것으로 기대한 사람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 정치 문제에 관해서만은 전혀 '소통'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은 굳이 비판할 가치조차도 없는 대상이었던듯 하다.
그러나 그 때 학내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주변 사람들과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 소통하고 사는 일반 학우들을 말한다-이회창에게 표를 주는 것은, 또 그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는 것은 상당한 이미지 다운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가스통 들고 시위하는 무식한 할아버지들과 같은 수준의 생각을 하고 살아가요'라고 소리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그 때 나는 이회창에게 표를 던진 사실을 내가 몸담고 있던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에 공개하면서 '나는 왜 이회창을 찍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나름대로 긴 글을 올렸다. 그 때 내 사고의 수준이 일천했던만큼 그 글의 수준 또한 일천했는데, 요약하자면 이회창이 대한민국의 우파를 그나마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현재(당시)의 정치지형에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일텐데, 이제 노무현이 당선된 이상 권력이 주어져 배가 불러질 좌파(노무현이 좌파인지에 대하여는 말이 많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는 분열될 것이며, 단기간 어려움에 처하게 될 우파는 3, 4공 찌끄러기부터 합리적 보수가 뒤섞인 채로 똘똘 뭉치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이 전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파가 집권한 지금은 그때와 반대로 좌파 실용주의를 요구하고 싶다. 7년 전의 나는, 아직 좌파는 정화보다는 성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좌파는 그 때의 우파가 그랬던 것처럼 정화가 필요한 존재로까지 성장하였다. 현재 우파는 권력을 되찾아 어느 정도 심적 여유가 있으며, '정부'라는 공적 위치에 있기에 정치적 반대세력은 물론 양심적인 지식인과 언론의 비판, 그리고 합리적 관료세력에 의해 어느 정도 '알아서' 자정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좌파는 반정부 투쟁과 대동단결, 그리고 진영의 논리 속에 7년 전 우파가 그랬던 것처럼 잡탕인 상태로 뭉쳐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좌파가 현 상태로 유지된다면, 결국 다음 대선, 또는 다다음 대선에서의 정권교체는 이룰지언정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은 쳇바퀴 돌듯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매한 집권세력의 실정과, 그들만큼 또는 그들 이상으로 우매하지만 현재 우매한 집권세력의 실정을 업고 집권하게 될 반대세력의 순환 말이다.
현재 우리의 좌파에는 실용주의가 도입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새롭게 생각하자!'는 것이고, 이는 곧 지난 날의 모든 고정관념을 떠나 비판적 이성에 입각하여 모든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새롭게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장의 매커니즘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현재 '시장'이라는 개념은 우파에게 독점되어 있고, 좌파에게 있어서는 'Public Enemy No.1'이다. 현재 주류 좌파담론은 시장참가자와 시장기구를 국가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그리고 시장을 대체할 새로운 메커니즘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시장기구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그리고 시장참가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재화의 분배가 결정된다는 것으로 그 자체가 자본친화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가가 시장기구 자체-특히 참가자의 자유로운 선택 부분-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특정 재화 또는 용역의 총수요와 총공급을 재정수단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도 시장은 얼마든지 사회적으로, 더하여 합리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교육문제를 예로 들자면, 공교육에 대대적 투자-특히 인적 부분에서-를 하되, 교육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에게 공교육 부분에서의 선택권을 강화하고 교원평가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공적 교육용역'을 보다 값싸고 양질로 공급되게 함과 동시에 수요측의 욕구가 반영되도록 함으로써 '사적 교육용역'의 시장 점유율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자립형 사립고와 같은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데, 이는 아예 공적 교육용역을 사적 교육용역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측의 대안은 광범위한 교육예산 확보에 중점이 있어야 하지, 교원평가제 반대와 같은 교원집단의 특수이익의 옹호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회적이면서 합리적인 것은 좌파의 오랜 꿈이었다. 나는 좌파가 시장기구를 이대로 버려둔 상태에서는 이 꿈을 달성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이 이 점은 가장 잘 포착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는 곧 좌파의 사고수식에서 '정치'라는 변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줄이거나, 아니면 아예 '정치' 변수를 제외한 사고 영역을 만들어보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현재 좌파가 과거의 개념을 그대로 답습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현재의 정치진형에 가장 긍정적이고,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불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좌파에서 '시장기구를 활용하자!'라는 주장이 나온다고 할 때, 곧바로 보수언론 및 우파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는 뻔하지 않은가. '좌파의 굴복'운운하는 문구로 도배될 것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마음이 무척 불편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좌파에게 불리한 정치적 결과로 연결될 것인가. 과연 그러한 전환과 대안을 갖춘 좌파에게 국민은 지금까지보다 더 등을 돌릴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지지를 줄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후자일 것으로 기대한다. 아마 현재 좌파에 기생하고 있는 특정계급-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교원노조가 대표적일 것인데-으로부터는 지지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잃을 것은 적고, 얻을 것은 많다. 근로 인민대중은 생각 외로, 정말 기대 이상으로 현명하다. 그들이 현재 민노당이 아닌 한나라당을 찍는 이유는 그들이 국개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고의 전제에 깔고 들어가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